기사 메일전송
[최자영의 요지경]이재명 대통령에게는 ‘국민을 위한’ 것만 있고, ‘국민에 의한’ 것이 없다 – 이재명의 세계정치학회 모두(시작)발언에 부쳐
  • 기사등록 2025-07-18 12:46:58
  • 기사수정 2025-07-20 15:07:08
기사수정

민주주의란, 편견을 가진 주인, 민중이 서로 이해를 조율하는 미시적 절차
본질상 복잡, 까칠하고, 논쟁적인 민주의 형식은 위대한 것이 될 수가 없어
제각기 편견을 가진 시민이 최종 결정권을 갖는 점에서 민주는 수시로 오류를 초래
이견, 분란을 조정하는 절차로서의 민주의 가치는 독재를 방지하는 최선책


세계정치학회가 서울 코엑스(2025.7.13.)에서 열렸고, 대통령 이재명이 모두(시작)발언을 했다. 세계 정치학자 1,000명이 모인 이 서울총회에서 이재명이 한 기조연설을 두고, “강남에 울려퍼진 이재명 대통령의 목소리에 전 세계 정치학자 수백 명 감동의 박수 터졌다”(전주 MBC News)는 평가가 회자한다.


이 자리에서 이재명은 준비된 원고를 읽기 전에, 간단하게 즉흥 발언을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가 준비된 말씀을 드리기 전에 저는 우리 대한민국이 전 세계 역사에 남을 위대한 민주주의의 새길을 열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민주주의를 배우고, 민주주의는 그리스의 아테네가 상징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도래한 새로운 이 세상의 환경에서 진정한 주권자들의 의지가 일상적으로 정치에 반영되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 확실한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범은 대한민국 서울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전 세계인들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이어 준비된 원고에서, 이재명은 “갈등과 분열을 심화하는 불평등과 양극화, 국민을 갈가리 갈라놓는 정치적 극단주의, 각자도생의 사회 질서가 유발한 고립과 소외에 맞서 공존과 화해, 연대의 다리를 새롭게 놓을 시간”, “갈등보다 대화를, 상처보다는 치유를, 대립보다는 화해를, 비난보다는 협력을, 혐오보다 서로를 살피고 돌보는 상생의 가치를 회복해야 할 때”, “‘K-민주주의’의 핵심 정신은 민주주의의 가치인 자유, 평등, 연대를 철저히 복원하는 것” 등을 천명했다.


위 즉흥 발언 및 준비된 원고에서 드러난 바, 이재명의 민주주의 이해는 적어도 두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민주주의는 의사결정의 절차를 말하는 것이므로, 절차 자체가 위대해질 수는 없다는 점이다. 민주주의 자체는, 위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잡다단하고 지질하고 누추한 측면을 지닌 것이다. 다수 민중의 의견을 조정하여 결정에 이르는 과정은 그러하다.


그 민주의 절차를 통해 나타나는 결과는 성공과 실패의 가능성이 확률상 반반이다. 언제나 위대하다고도, 언제나 엉망일 것라고도 단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불변의 진리는 부족한 인간의 속성에 기인한 부득이한 것이라, 이재명이 나서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절차 자체가 위대하거나, 위대해질 가능성은 없다.


이재명이 범한 둘째 오류는 “자유, 평등, 연대를 철저히 복원하는 것”이 K-민주주의의 핵심 정신 및 민주주의의 가치를 복원하는 것이라 본 점이다. 사실 “민주주의와 경제는 결코 떼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이재명의 말은 일리가 없지 않다. 민주가 경제와 동일한 개념은 아니지만,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은 각자가 가져야 할 마땅한 몫을 챙기는 데 유용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재명이 “‘자유’란 곧 ‘경제’”라고 한 것은 자유의 개념을 일면적으로 정의한 것이다. 자유를 경제와 동일시한 근거는, 자유를, 간섭받지 않을 자유, 제약받지 않을 자유(소극적 자유)가 아니라, 적극적인 자유여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적극적 자유는, 불평등과 양극화, 빈곤의 파고가 성장을 가로막는 위기의 시대를 극복하고, 굶주림을 채워줄 따뜻한 식사,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괜찮은 일자리, 빚의 늪에서 벗어나게 해 줄 사회안전망을 뜻한다.


이재명의 자유 담론은 20세기 이사야 벌린의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의 구분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고대 아테네 민주정치의 자유 담론은 이재명식의 경제적 평등. 혹은 이사야 벌린 식의 적극, 소극의 구분 같은 것이 아니라, 독재권력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경제가 아니라 권력구조에 관련된 개념이다. 이재명이 말하는 경제적 평등은 자유가 아니라 민주적 절차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이때도 민주는 경제 자체의 내용을 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절차의 형식이다.


다시 이재명은 자유를 풀이하여, “자유롭게 선택할 자유를 넘어선 평등할 자유”, “공동체의 향방에 대해서 함께 토론하고 참여할 자유”, “한 사람의 사회구성원으로 자립할 수 있는 자유”로 정의하고, 이런 자유가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원동력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대 아테네의 자유는 담론의 맥락 자체가 다르다. 그것은 스스로의 선택, 토론, 자립 등의 개인적 사안이 아니라, 권력구조적인 것으로서 독재권력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재명은, 한편에, “민주주의의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길에, 우리 대한민국이 맨 앞에서 담대하게 나아갈 것”, “민주주의의 힘을, 주권자의 저력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고개를 들어 동방의 나라 대한민국을 바라보라”, “K-민주주의가 열어갈 희망의 행진을 지켜보라”, 다른 한편엔, “‘빛의 혁명’으로 탄생한 국민주권정부는 국민추천제, 국민사서함, 전국 방방곡곡 타운홀미팅을 시작으로 주권자의 목소리를 국정의 나침반으로 삼는 직접민주주의의 실험과 혁신을 끊임없이 시도”,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주의 본연의 가치와 정신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국민과의 직접 소통을 일상화, 제도화하고, 국정운영에 적극 반영하는 명실상부한 ‘국민이 주인인 나라’로 만들어 갈 것” 등을 천명했다.


이재명의 이 같은 발언에도 크게 두 가지 개념의 오류가 있다. 첫째, 이재명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길을 대한민국이 맨 앞에서 나갈 것”이라 한 것이다. ‘새로운 길’을 제시하자면, 먼저 ‘옛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옛것’을 알아야, ‘새것’이 ‘옛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재명은 ‘옛것’이 무엇인지를 터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사실은 그가 ‘새것’이라고 제시하는 민주주의가 ‘옛것’의 민주주의를 배반하고, 그 반대 방향인 독재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이재명이 ‘민주’라는 기치를 걸고, 사실상 지향하는 독재의 징후는 몇 가지 논설에서 드러난다. 우선 그가 빛의 혁명으로 국민주권정부가 탄생했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것은 성급하고 사실을 왜곡한 것으로서, 아직 국민주권정부는 탄생하지 않았다. 이재명이 새로운 민주의 청사진으로 여기는 ‘국민추천제’는, 결정권을 국민 민중이 행사하는 것이 아니므로, 아직 국민주권정부 탄생의 상징이 될 수가 없다.


이재명이 앞으로 만들어갈 “국민이 주인인 나라”는 “국민과의 직접 소통을 일상화, 제도화하고, 국정운영에 적극 반영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국민과 소통하여 국정운영에 반영”, “방방곡곡 타운홀미팅으로 주권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등은 궁극적 결정권자가 국민 민중이 아니라는 것, 국민 민중은, 주인이 아니라, 권력자의 결심과 선처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둘째 오류는, 경제적 평등에 천착하는 이재명에게 권력구조적인 측면의 민주와 자유의 개념이 종적을 감추어버렸다는 점이다. 고대 아테네의 자유는 독재권력에 대한 저항이었고, 민주는 권력자가 굶주린 민중을 위해서 선처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스스로 결정권을 행사함으로써 경제적 평등 등을 실천하는 절차였다. 그 절차는, 결과적으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죽도 밥도 안 되든, 그런 것과 무관하게 유효하다. 민중은 주인이기 때문이다. 주인은 좋고 나쁘고 여부와 무관하게 자기 것에 대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고, 결과가 안 좋다는 이유로 자기 권리를 뺏기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이재명은 이 같은 고대 아테네 민주의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K-민주주의를 세계만방에 알리겠다고 한다. 경계해 마지 않을 일은, 그가 말하는 새로운 K-민주란, 민주는 물론 자유의 개념마저 왜곡하고, 오히려 자유를 지향했던 고대 아테네인이 가장 경계했던 바로 그 독재의 권력구조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것은 식민 지배와 독재정권의 아류인 전통의 한국형 독재로서, 민주도 자유도 아닌 획일적 결정의 권력구조이다.


약 150년 전 미국의 링컨이 민주주의를 정의하여,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것이라 했다. ‘굶주린 배’를 채워주고 싶은 이재명에게, ‘민중을 위한’ 열망은 있으나, ‘민중에 의한’ 결정권이라는 제도의 형식이 실종되었다. 잘난 이가 민중의 뜻을 헤아려서 떠 먹여주는 것을 받아먹는 이는 민주에서 말하는 ‘주인’이 아니라 ‘객’이다. 그 ‘객’이 찬밥 신세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권력자의 호의에 의한 대접은 권력자 기호의 향방에 따라 홀연히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세계정치학회에서 이재명이 한 기조연설 동영상, “전 세계 정치학자 수백 명 감동의 박수 터졌다”(전주 MBC News)에 많은 댓글이 달렸다, “하늘이 내려주신 대통령, 이재명 대통령”, “정치를 외면했던 지난날을 반성합니다”,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꿈만 같군요! 실용적이고 인간적이며 합리주의자인 이재명이 이끄는 대한민국 부디 성공하길 확신합니다” 등이다.


대통령과 시민 민중이 서로 민주주의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데서 닮은꼴이다. 한편으로, 대통령은 민중이 궁극적 결정권 행사해야 한다는 생각은 아예 배제하고, 대신 그 뜻을 헤아려 대신 자신이 잘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졌다. 혼자서 결정하는 것은 권력구조적으로 독재이다. 사실 독재는 절차상 단순하고, 때로 잘하면 위대한 영광이 따르기도 한다. 다수 민중이 결정에 이르는 지난한 과정을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정권자가 국민의 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는가 하는 것은 권력구조의 문제와 무관하다. 이재명은 “국민이 추천”, “방방곡곡 타운홀미팅으로 주권자의 목소리를 들어 국정의 나침반으로 삼는 것”을 직접민주주의의 실험이라고 정의했으나, 그렇지 않다. 추천을 받거나 목소리를 듣는 것은 결정권자의 자의적 선의와 경향에 기인한 것이고,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민중이 주인이라는 뜻의 민주, 혹은 직접민주란 민중이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을 뜻한다.


다른 한편, 시민 민중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또 그런 수고를 감내해야 한다는 생각은 숫제 하지 않고, 타인에게 죄다 맡겨놓긴 다음, 그 실과만 향유하겠다는 안이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수동적, 봉건적 시민들은 윤석열 같은 이가 권좌에 오를 때 무방비로 노출된다. 현재로서, 우리네 대통령과 국민 민중이 모두 그 나물에 그 밥, 도긴개긴이다.


민주주의 아닌 것, 때로 민주를 배반하는 독재의 권력구조를 민주주의라 규정하는 이 같은 오류는 이재명뿐 아니라, 한국인의 심성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봉건적 수동성에 기인한다. 이재명은, 옛 아테네에서 민중이 결정권을 행사하던 기존 민주정치를 대신하여, 민주 아닌 독재의 권력구조를 새롭고 위대한 K-민주주의인 것으로 세계만방에 잘못 고하고 있다.

TAG
0
기사수정
  • 기사등록 2025-07-18 12:46:58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배너
배너
배너
광주교육진흥원
전라남도교육감-강숙영 박사
추천기사더보기
뉴스리뷰더보기
확대이미지 영역
  •  기사 이미지 [정석원칼럼] 억지로 만든 유죄, 민주공화국의 수치
  •  기사 이미지 맛대맛, 24년 장어 명가의 길… 남도미식박람회 도전과 목포 지역경제의 새 물결
  •  기사 이미지 [정석원칼럼] 광복 80년, 국민이 대통령을 임명한 날
정책공감_리뉴얼
월간 Hot뉴스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